함께나눌이야기:)

[통일교 문선명 총재 별세]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3. 16:59

 [통일교 문선명 총재 별세]

 

 

요즘 이슈가 되는 '통일교 문선명 총재 별세'

나는 통일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리틀엔젤스와 맥콜?

그리고 합동결혼식?

 

문론 좋은 이미지는 아니였다.

하지만 아무리 이미지가 안좋았다고 할지라도,

생을 마감했다니 측은한 마음이 든다.

죽음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모든 부와 권력 존경까지 받았던 그는 누구인가.

(난 만난적도 없고 잘 모르니 기사를 참고 하겠다.)

 

 

 

 

 

 

 

 

 

리틀엔젤스

 

1962년 한국문화재단에 의해

한국 전통예술을 세계에 알리려는 목적으로 창단되었다.

단원은 8∼14세의 소녀들로 구성되며,

2000년 현재 200여 명의 단원을 두 팀으로 나누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1965년 9월 미국 게티스버그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위한

특별공연을 시작으로 해마다 해외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때는 민속예술제에 참가하여 ‘앙코르상’을 수상하였고,

1972년 프랑스 공연을 수록한 영화가 프랑스 국영텔레비전에서

‘1972년도 최우수 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순수 민간단체로는

처음으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봉화예술극장 및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3회에 걸쳐 공연을 가졌다.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는 부채춤·장구춤·농악·가야금병창 등

한국 고유의 가락과 합창곡 《우리의 노래》 《세계의 노래》 등으로 다양하다.

 

 

 

 

 

 

문선명은 누구인가…

“내 이름 석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3일 새벽 향년 92세로 별세한 문선명 통일교 총재는 2009년 펴낸 회고록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이같이 고백했다.

1920년 1월6일 평북 정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와세다대 전기학과를 졸업하고 6·25 전쟁 휴전 다음해인 1954년 통일교를 창시했다.



문 총재는 열여섯 살 때 부활절 날 기도하던 중 예수에게서 소명과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1954년 5월1일 서울 성동구 북학동 한 가정집에서 창립한 신흥 종교 통일교는

불과 50여 년 만에서 전 세계 194개국 300여만 신도를 거느린 종교 단체로 성장했다.

1958년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 선교의 닻을 올렸으며

1970년대 초반 미국에 건너가 선교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해외 선교를 본격화했다.

'순결한 가정'을 기치로 1961년 36쌍을 시작으로 합동결혼식을 치렀으며

 1992년8월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3만 쌍 국제 합동결혼식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하지만 통일교의 성장과정은 문 총재가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순탄치 않았다.

문 총재는 일제식민기와 광복 후 공산 치하 북한, 이승만 정권 시절,

 그리고 미국 등에서 모두 6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2008년 7월에는 헬기 불시착 사고로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통일교 역시 문 총재를 메시아로 보는 교리 때문에 이단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통일교는 1997년 창립 43년 만에 정식 명칭인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는 등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 총재는 이단 시비와 각종 논란에도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사업 수완을 발휘,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여왔다.

통일교가 보유한 사업체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일화, 용평리조트를 비롯해 국내에만 10여 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일보, 미국 워싱턴타임스, UPI 통신, 리틀엔젤스 예술단,

유니버설 발레단 등 언론 문화 예술 단체도 소유하고 있다. 선문대,

선화예술중고교, 미국 브리지포트대 등 교육기관도 운영한다.

회고록에서 "평화 세계를 이루기 위해

나는 평생 세상의 낮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고 밝힌

문 총재는 1970년대부터 세계 평화 운동에 매진했다.

2005년 천주평화연합을 창립한 데 이어 2010년에는

 유엔을 대체할 평화 기구로 '부모 유엔'을 창설했다.

1990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세계 평화 등을 논의했다.

문 총재는 회고록에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면담한 자리에서

한국과 수교할 것을 촉구했다고 언급,

곧이어 성사된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전 세계 종교 지도자를 초청해 예루살렘에서 평화 대행진을 수차례 벌였다.

2003년부터는 세계 클럽 축구 대회인 '피스컵'을 열었다.

문 총재는 북한과도 인연이 깊다.

1987년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창립했으며 1991년 북한을 처음 방문,

당시 북한에 생존한 여동생을 상봉하고,

흥남까지 헬기를 타고 가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 주석과 환담했다.

통일교에 따르면 문 총재는 당시 김일성 주석 앞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책상을 치며 호통을 쳐 동행한 이들을 긴장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문 총재는 김일성 주석과 금강산 개발투자 등

다양한 대북투자 사업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통일교 계열로 알려진 평화자동차가 설립한

남포 자동차공장은 보기 드문 대북투자 성공 사례로 꼽힌다.

문 총재는 남북청년학생세미나, 리틀엔젤스 방북 공연,

평양학생소년예술단 답방 공연 등을 성사시키며 남북 민간교류 창구 역할도 했다.

작년 12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북한에 조화를 보냈다.

문 총재는 40세 되던 1960년 23세 연하의 한학자 씨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7남6녀를 두고 있다.

1983년에는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동아닷컴>

 

 

 

 


 

 

 

▲ 3일 오전 타계한 고 문선명 총재     ©브레이크뉴스


 
[브레이크뉴스=문흥수 기자]

 

통일교는 3일 오전 통일교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의 타계 소식을 전하며 '성화(聖和)했다'고 표현했다.
 
보통 언론에서 유명인사의 사망소식을 전할 때 '타계', '서거' 혹은 '별세'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데 반해 '성화'는 일반인에겐 조금 생소한 표현이다.
 
이에 대해 통일교측은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순간이라는 인식에 기반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통일교가 성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1월부터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엔 죽음을 승화(昇華)로, 장례식은 승화식(昇華式)으로 표현해왔다.
 
문 총재는 지난해 4월 ‘천지인참부모 정착 실체말씀 선포대회’를 통해 "복귀섭리를 최종적으로 완성·완결·완료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통일교 관계자는 "이는 문 총재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서 해야 하는 모든 책임과 사명을 다 이뤘다고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승화식이 성화식으로 바뀐 것은 이런 토대 위에서 가능하게 됐다는 것.
 
앞서 문 총재는 죽음에 대해서도 "지상생활을 마감하고 영계로 가는 순간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때"라며 "죽음은 새색시가 시집가는 순간보다도 더 가슴 떨리고 흥분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문 총재는 또한 "죽음이란 단어는 신성한 말이다. 슬픔과 고통의 대명사가 아니다. 지상계의 삶을 꽃피우고 열매 맺어 알곡을 품고 환희와 승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때가 영계 입문의 순간이다. 기뻐해야 할 순간이다. 마음껏 축하하고 전송해 주어야 할 때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흘려주어야 할 때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통일교에서는 죽음은 성스럽고 숭고한 일이라고 보고, 성화식 때 검은 리본이나 단색의 조화(弔花) 대신 흰 리본이나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다.
 
한편, 문 총재는 3일 새벽 1시54분경 경기 가평에 위치한 청심국제병원에서 성화했다.
 

 

 

 

 

 

 

새삼 기사를 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이단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경제적으로 막강한 힘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스스로 메시야라고 했던,

하지만 죽음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타계, 별세가 아닌 성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를 부모라고 따랐던 수만명의 통일교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걸까.

 

평화를 외치고 통일을 외쳤지만,

정말 성경을 가감하지 않고 가르치고 행했을까.

자신이 믿는 신앞에 부끄럽지 않았을까.

양심과 도덕앞에서는.

 

 

이런저런 궁금증이 든다.

 

종교의 종말이라는 이때.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 자신도 약한 인간일뿐-

진짜 참 신이 있다면, 이 악한 세상. 빨리 변화 되어

정말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